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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공간

沙平驛에서 - 곽재구

by 수락산 2015. 10. 21.

沙平驛에서    

                - 곽재구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창비시선 40, 곽재구 시집 '사평역에서',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