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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방네 노을길 해설자료(스크랩)

by 수락산 2021. 5. 21.
(장서방네 노을길)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돌아올 줄 모르는데 찬바람 부는 고향언덕엔 저녁노을만 불게 타고 있다. 계양바다에 황포돗대는 전설이 되고 도두리벌 대추리벌의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은 역사속에 묻혀버렸다. 누가와서 다시 부르리오. 저 노을에 비끼는 고향마을에 스산한 그림자를...도두리와 대추리 벌판은 이미 캠프험프리기지로 편입되어 군사시설들이 빼곡하게 시야를 채울 뿐이다. 불과 한세대 전의 사람들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지켜낸 삶의 흔적들은 신대리와 본정리에 겨우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시대의 가객 정태춘의 노래는 자신의 고향 이곳에서 자양분을 삼아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해도 허튼 소리는 아니다. 그의 수많은 토속적인 노래들이 이곳을 배경으로 했으며 부모들의 희망과 설움을 바닥으로 하고 있다.

(도두리벌에 세워진 미군기지)
당신의 고단한 삶에 바람조차 설운 날먼 산에는 단풍 지고 바닷물도 차더이다서편 가득 타오르는 노을빛에 겨운님의 가슴 내가 안고 육자배기나 할까요
‘장서방네 노을길’ 외에 ‘고향집가세’, ‘나그네’, ‘떠나가는 배’, ‘떠나는 사람들의 슬픔, ‘산너머 두메’ ‘서해에서’, ‘실향가’, ‘황토강으로’ ‘저들에 불을 놓아’ 등이 자신의 고향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의 서정성 깊은 노래는 고향과 농촌의 토속성이 훼손되고 사라져 감을 아쉬워하며 더 나아가서 문명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의 노래가 강한 서정성을 강조하면서도 광범위한 폭력에 대한 저항과 상실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는 것은 그의 삶과 환경이 줄곧 그렇게 주어졌기 때문이라 보인다.
비바람에 거친 세월도 님의 품에 묻고여러 십년을 한결 같이 눌 바라고 기다리오기다리다 맺힌 한은 무엇으로 풀으요저문 언덕에 해도 지면 밤벌레나 될까요
‘장서방네 노을길’은 도두리 신대리 간척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이곳 사람들이 계양바다라고 불렀던(경양이라는 이름이 겨양이 되고 계양으로 변한 것으로 보임) 지금의 평택호의 중류에 해당하는 신왕리와 노양리에서 석봉리까지 바닷물이 밀려들었던 간사지에 둑을 막고 농토를 조성하는 처절한 자연과의 싸움, 그리고 이후 80년대 세종대와의 토지분쟁이 가져온 허탈함과 고단함이 그대로 묻어있는 노래다. 쌓으면 밀물에 무너지고 또 쌓으면 썰물에 무너지는 지난한 싸움을 이기지 못해 떠난 사람들이나 끝끝내 주린배를 움켜쥐고 살아남아서 한 뼘일지라도 자신의 농토를 손에 쥔 사람이나 삶의 큰 방향을 바꾸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 깨지고 터지는 삶에 이제는 그것마져 추억하기 어려운 고향마을에 무슨 회한으로 육자배기나 할까.

( 망해산에서본 노을)
어찌하리, 어찌하리 버림받은 그 긴 세월동구 아래 저녁 마을엔 연기만 피어나는데아, 모두 떠나 가 버리고해지는 고향으로 돌아올 줄 모르네
노래 ‘장서방네 노을’이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장서방네 노을길’은 그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상전벽해가 되어버린 도두리와 대추리를 추억하며' 에고 도솔천아'에 나오는 선말산이나 선말고개, 아리랑고개를 포함하는 신대리와 본정리, 평택의 관문이라 할 만한 경양나루를 까지 마을길과 산길을 약 5Km걷도록 하고 있다. ‘장서방네 노을’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이 지역의 내력들을 추억해보고 운이 좋으면 경양포자리에 보전중인 계양등대나 영창마을 뒷산에서 계양바다에 그려놓는 석양의 햇자락을 감상해 보는 운치도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좌측산이 망해봉 우측끝 농어촌공사건물이 경양포등대가 있던곳)
솔밭길로 야산 넘어 갯 바람은 불고님의 얼굴 노을 빛에 취한 듯이 붉은데곱은 허리 곧추세우고 뒷짐 지고 서면바람에 부푼 황포돛대 오늘 다시 보오리다
길은 본래 아무 곳에도 없었고 아무 곳에나 있었다. 즉 누군가 지나다니면 그것이 곧 길이요 고개가 되었다. 이곳에도 마을 사람들이 휴식을 위해 길을 내었다. 신대1리 버스정류장에서 영창마을 뒷산으로 넘어가는 길은 잡목과 아까시 나무들로 뒤덥혔지만 길은 빼꼼히 열려 앞으로 나가기에 지장이 없다. 이곳이 ‘장서방네 노을길’을 걷는 첫 번째 위치다. 산을 넘어서면 다리쉼을 할 수 있는 밴치도 있어 계양바다와 강 건너 광덕산이 훤히 보인다. 이 산이 이름대로 망해산(望海山)이다. 전남 여수에서 올라오는 제5봉수의 직봉이라고 한다. 갯골을 따라 경양포에서 신왕나루로 건너가는 황포돗배가 이제 서서히 석양빛에 물드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아버지들을 닮은 검게 그을린 얼굴들의 사공들도 그 한 많은 세상에 갯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생선을 굽던 냄새도 마을에 자욱히 끼던 저녁짓는 연기도 사라져 버려 돌아올 줄 모르는 고향마을은 가슴에 묻혀 있다. 이러다 영영 묻혀버린다는 상상도 쉬이 할 수 없다.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가객의 노래 소리만 지는 해를 따라 맴돌고 있다.
(묘지의 길도 연결되어 나그네와 교감하기도 한다)아래쪽으로 내려와 왼쪽을 살펴보면 보통의 크기보다 큰 묘를 볼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의 말로는 가당치도 않은 허묘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렇게 큰 허묘를 조성 한 것도 고향과 돌아갈 곳에 대한 바램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나의 뿌리가 이곳 입네하고, 내 조상이 여기 묻혀입네하는 것이다. 자신과 이 지역의 연고를 주장함으로서 자신들의 현재와 존재의 기틀을 확고히 하려는 것 아닌가.
비나이다, 비나이다 되돌리기 비나이다가슴치고 통곡해도 속절없는 그 세월을아, 모두 떠나 가 버리고기다리는 님에게로 돌아올 줄 모르네
 
노래는 여전히 나직하다. 흥얼거리는 타령조로 상실의 고향길을 아쉬워 흐느낀다. 돌아올줄모르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무엇이 되었을까? 굽은 허리 곧추세우고 뒷짐 지고 서면 바람에 부푼 황포돛대 오늘 다시 볼 것이다. 그렇다. 고향은 기억을 복원하는 곳이다. 그래서 고향은 돌아가는 곳이다. 인간의 귀소본능은 따지고 보면 짐승과 다르다. 인간에겐 그것이 문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귀소본능이 사라진 ‘노마드’ 일뿐 그래서 잃어버리는 정신들이야말로 지키고 세워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부담스러워 해야 할 것이다. 해가지면 집으로 돌아가는 짐승들의 그것과 달리 인간의 귀소본능은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수많은 철학적 질문으로 새로운 문명질서를 창조하지 않았는가. 신대리 야구장을 끼고 돌아 노양리 뒷산으로 올라붙으면 군부대가 나온다. 군부대 철망옆으로 길이 나있다. 군부대에서는 사람들이 접근하면 사진촬영을 금지한다고 귀가 따갑게 되뇌이는 방송을 틀어댄다. 이 길은 성묘객들이 만든 길이다. 죽은 자와 산자를 연결하는 길이다. 멀리 객지를 서성이다가 고향에 돌아온 이들일지언정 그들은 고향마을 아늑한 곳에 영면의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게 인심이고 죽은 자에 대한 예의였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그리 멀리 떨어진 곳에 안식하진 않았다. 가까운 산언저리 밭언저리가 산자든 죽은자든 함께 했다. 즉 삶과 죽음이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 연장이라고 봤던 것이다. 길처럼 언제나 이어진 것으로 인식해 서로를 격리하지 않았다. 이제 모두가 화장을 해버리는, 그래서 죽은 자와 산자의 이야기는 단절돼 버리고 서로 음식을 나누던 교감도 끊겨 언젠가는 이 길마저 막힐 것이다.
당신의 고단한 삶에 노을 빛이 들고꼬부라진 동구길엔 풀벌레만 우는데저녁 해에 긴 그림자도 님의 뜻만 같이흔들리다 멀어지다 어둠속에 깃드는데

(경양포 등대)
이 산자락을 마루금으로 따라가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다. 새로운 길은 옛날길을 너무 쉽게 우습게 망가뜨리고 목적지로 달려버린다. 43번국도 세종시 가는 자동차 전용도로다. 예전 같으면 축지법도 이런 축지법이 없다. 땅을 접어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방법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도사만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나 할 수 있다. 맘만 먹으면 하루에 부산을 두어번도 다녀올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단 말이다. 걸어서 한 시간 남짓걸리는 ‘장서방네 노을길’이 아나로그면 이 자동차 전용도로는 디지털이다. 아나로그가 디지털에 묻히는 경우는 도로에서도 나타난다. 도로를 돌아서 내려서면 아산시와 경계인 둔포천 다리가 나온다. 이곳이 경양포 옛터이고 한쪽으로 비켜서 경양포 등대가 개인집 마당에 보관중이다. 농어촌공사가 철거하려고 했는데 자기집 마당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둔포천은 둔포까지 배가 드나드는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노양리 벌판과 계양바다, 그리고 둔포천 주변의 농지는 이 지역 유력자인 윤보선과 윤치호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지역 사람들이 윤씨네 집 작인들로 살아왔던 흔적과 내음들은 여기저기 남아있다.
저녁 해에 긴 그림자도 님의 뜻만 같이흔들리다 멀어지다 어둠속에 깃드는데저녁 해에 긴 그림자도 님의 뜻만 같이흔들리다 멀어지다 어둠속에 깃드는데
들판이 끝나는 부분에 본정2리 회관 쪽으로 꺽어 도는데 회관 주변의 소나무가 볼만하다. 본정리를 뒤로 하고 신대2리 큰길로 나서면 여기가 바로 정태춘 노래에 나오는 ‘아리랑 고개’이다. 고개 같지도 않은 이 ‘아리랑 고개’를 넘으면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나그네가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따리를 짊어지고 이 동네를 떠야했던 저간의 한과 슬픔과 분노들이 이 고개에 자리 하기에 ‘아리랑고개’라고 했을 것이다. 고개를 넘어 들어왔을 때는 희망을 품고 왔지만 굶주림에 죽고 제방공사에 다치고 병신 된 몸으로 다시 이 고개를 넘었을 테니 어찌 ‘아리랑 고개’가 아니겠는가. 정한수를 떠놓고 새벽마다 떠나간 자들의 무사귀환을비는 어미들의 가슴이 져미어지는 공간이다. 무심코 지나는 차량들은 고개인줄 느끼기도 전에 올라서버리는 고개마루에서 한숨의 눈물을 훔치던 저 남루의 어머니... 어머니의 긴 그림자가 어둠속에 깃드는데.....

(아리랑고개)
길은 이어진다.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 하는 길도 있고 뻥 뚫린 대로로 인도하는 길도 있다. 인생에 맞닥뜨리는 길이 다양 하듯이 인생도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시야를 멀리 두고 바라볼 때 마을에 피어오르는 크고 작은 저녁연기에 저간의 사정들이 비슷비슷한 남부여대의 사람들이 살아간다. 이 길을 무시로 걸었던 사람들, 그들이 짚신으로 걸었던 고무신으로 걸었던 혹은 구두신발로 걸었던 그들의 삶은 아기자기 한 것이거나 올망졸망 한 것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길에 남긴 사연은 씻기고 바래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어 신화가 된다는 말이다.
사이사이에 장서방네노을 가사를 삽입하였다. 歸廬齋에서 한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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