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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박은옥

[스크랩] Concert 대본

by 수락산 2013. 7. 25.
     정태춘 박은옥 30주년 콘서트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Intro/

    詩 1.

                  아,
                  열차는 달리고
                  나는 거기서 내렸다
                  정거장도 없이 달리는 쾌속의 궤도 열차
                  거기서 뛰어내렸다
                  피가 흐른다

                  그리고, 아직도
                  그 문명 열차의 가속도가 내 몸에 남아
                  그 궤도를 따라 계속 구르고 있다
                  구르고 있다

                  이제,
                  그 열차에서보다 더 만신창이가 되어 내가
                  멈추어 설 땅은 과연 어디일까?
                  나의 대지는 어디일까?
                  내가 다시 두 무릎을 세우고 일어설
                  나의 대지는...








노래 1./
빈 산

산모퉁이 그 너머 능선 위
해는 처연하게 잠기어만 가고
대륙풍 떠도는 먼 갯벌 하늘 위
붉은 노을 자락 타오르기만 하고

억새 춤 추는 저 마을 뒤 빈 산
작은 새 두어 마리 집으로 가고
늙은 오동 나무 그 아래 외딴 집
수숫대 울타리 갈 바람에 떨고


황토 먼지 날리는 신작로
저녁 버스 천천히 떠나고
플라타나스 꼭대기 햇살이 남아
길 아래 개여울 물소리만 듣고

먼 바다 물결 건너 산 은사시
날 저문 산 길 설마 누가 올까
해는 산 너머 아주 져버리고
붉은 노을 자락 사위어만 가고

거기 저 빈 산에 하루가 가고
붉은 노을 자락 사위어만 가고












   
노래 2./
北漢江에서

저 어둔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릴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짙은 안개 속으로 새벽 강은 흐르고
나는 그 강물에 여윈 내 손을 담그고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릴 들으려 했오
강물 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치며 흘러가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오

아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 때
우리 이젠 새벽 강을 보러 떠나요
과거로 되돌아가듯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이 있오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거요








노래 3./
回   想

해지고 노을 물드는 바닷가
이제 또다시 찾아온 저녁에
물새들의 울음소리 저 멀리 들리는
여기 고요한 섬마을에서

나 차라리 저 파도에 부딪치는
바위라도 되었어야 했을걸
세월은 쉬지 않고 파도를 몰아다가
바위 가슴에 때려 안겨주네

그대, 내 생각 잊었나
내 모습 잊었나
바위, 검은 바위  파도가 씻어주고
내 가슴 슬픈 사랑 그 누가 씻어주리  음...
저편에 달이 뜨고 물결도 잠들며는
내 가슴 설운 사랑 고요히 잠이 들까   음...

그대, 내 생각 잊었나
우리 사랑 잊었나
그대 노래 소리 파도에 부서지며
내 가슴 적시던 날을 벌써 잊었단 말이
음...
또 하루가 가고 세월이 흐를수록
내 가슴 설운 사랑 슬픔만 더해가리
음...








노래 4./
촛  불

소리 없이 어둠이 내리고
길손처럼 또 밤이 찾아오면
창가에 촛불 밝혀 두리라
외로움을 태우리라

나를 버리신 내 님 생각에
오늘도 잠 못 이뤄 지새우며
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노라
이 밤이 다 가도록

사랑은 불빛 아래 흔들리며
내 마음 사로잡는데
차갑게 식지 않는 미련은
촛불처럼 타오르네

나를 버리신 내 님 생각에
오늘도 잠 못 이뤄 지새우며
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노라
이 밤이 다 가도록








노래 5./
떠나가는 배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
겨울비에 젖은 돛에 가득 찬바람을 안고서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봄 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 곳이 어드메뇨
강남 길로 해남 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어둠 속으로 물결 너머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

너를 두고 간다는 아픈 다짐도 없이
남기고 가져 갈 것 없는 저 무욕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언제 우리 다시 만날까
꾸밈 없이 꾸밈 없이 홀로 떠나가는 배
바람 소리 파도 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올 뿐







詩 2.
               슬픈 런치

              잭 스테이크, 5층
              올림픽 공원 쪽 창가에서
              빠알간 야채 수프를 홀짝이고 있었다
              빗물이 주르르 주르르 흘러내리는
              잘 닦여진 유리창 너머로
              일기는
              촉촉한 오후 안개비 모오드

              멀리
              공원 반대편 끝자락쯤의 잘 자란 포플러나무들이
              늪 뚝방 둔덕으로 커텐처럼 줄지어 서 있고
              그 너머
              세상에 대해선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안개비와
              푸른 나무들 커텐 너머
              그저 희뿌열 뿐,

              거기가 바로
              나의 환상이 머무는 곳
              때론 가슴 뛰거나
              눈물 나게 할 것 같은
              자본주의 세상
              저 너머 …

              호주산 소고기 등심 안심 번갈아 썰어 입에 집어넣고
              틀니로 우그작 우그작 씹으며
              빗물 주르르
              주르르 흘러내리는
              유리창 너머를
              망연히
              망연히
              바라만 보았다  








노래 6./
서울의 달

저무는 이 거리에 바람이 불고
돌아가는 발길마다 무거운데
화사한 가로등 불빛 너머
뿌연 하늘에 초라한 작은 달
오늘밤도 그 누구의 밤길 지키려
어둔 골목, 골목까지 따라와
취한 발길 무겁게 막아서는
아, 차가운 서울의 달

한낮의 그림자도 사라지고
마주치는 눈길마다 피곤한데
고향 잃은 사람들의 어엿 위로
또한 무거운 짐이 되어 얹힌 달
오늘밤도 어느 산길, 어느 들판에
그 처연한 빛을 모두 뿌리고
밤새워 이 거리 서성대는
아, 고단한 서울의 달









노래 7./
봉 숭 아
 
 초저녁 별빛은 초롱해도
 이 밤이 다하면 질터인데
 그리운 내 님은 어딜 가고
 저 별이 지기를 기다리나

 손톱끝에 봉숭아 빨개도
 몇 밤만 지나면 질터인데
 손가락마다 무명실 매어주던
 곱디고운 내 님은 어딜 갔나

 별 사이로 맑은 달
 구름 걷혀 나타나듯
 고운 내 님 웃는 얼굴
 어둠 뚫고 나타나소

 초롱한 저 별빛이 지기 전에
 구름 속 달님도 나오시고
 손톱 끝에 봉숭아 지기 전에
 그리운 내 님도 돌아오소









노래 8./
우리들의 죽음

                                
 “맞벌이 영세 서민 부부가 방문을 잠그고 일을 나간 사이 지하 셋방에서 불이나 방 안에서 놀던 어린 자녀들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질식해 숨졌다. 불이 났을 때 아버지 權씨는 경기도 부천의 직장으로, 어머니 李씨는 합정동으로 파출부 일을 나가 있었으며, 아이들이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방문을 밖에서 자물쇠로 잠그고, 바깥 현관문도 잠가 둔 상태였다.
  연락을 받은 李씨가 달려와 문을 열었을 때, 다섯 살 혜영양은 방 바닥에 엎드린 채, 세 살 영철군은 옷더미 속에 코를 묻은 채 숨져 있었다.
  두 어린이가 숨진 방은 3평 크기로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와 비키니 옷장 등 가구류가 타다만 성냥과 함께 불에 그을려 있었다.
  이들 부부는 忠南 계룡면 금대 2리에서 논 900평에 농사를 짓다가 가난에 못 이겨 지난 88년 서울로 올라 왔으며, 지난해 10월 현재의 지하방을 전세 4백만 원에 얻어 살아왔다.
  어머니 李씨는 경찰에서 ‘평소 파출부로 나가면서 부엌에는 부엌칼과 연탄불이 있어 위험스럽고, 밖으로 나가면 길을 잃거나 유괴라도 당할 것 같아 방문을 채울 수 밖에 없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평소 李씨는 아이들이 먹을 점심상과 요강을 준비해 놓고 나가 일해 왔다고 말했다. 이들이 사는 주택에는 모두 6개의 지하방이 있으며, 각각 독립 구조로 돼있다.”


젊은 아버지는 새벽에 일 나가고 어머니도 돈 벌러 파출부 나가고
지하실 단칸방엔 어린 우리 둘이서 아침 햇살 드는 높은 창문 아래 앉아
방문은 밖으로 자물쇠 잠겨있고, 윗목에는 싸늘한 밥상과 요강이
엄마, 아빠가 돌아올 밤까지 우린 심심해도 할 게 없었네
낮엔 테레비도 안 하고 우린 켤 줄도 몰라
밤에 보는 테레비도 남의 나라 세상
엄마, 아빠는 한 번도 안나와 우리 집도, 우리 동네도 안나와
조그만 창문의 햇볕도 스러지고 우린 종일 누워 천정만 바라보다
잠이 들다 깨다 꿈인지도 모르게 또 성냥불 장난을 했었어

배가 고프기도 전에 밥은 다 먹어치우고 오줌이 안 마려운데도 요강으로
우린 그런 것 밖엔 또 할 게 없었네, 동생은 아직 말을 잘 못하니까
후미진 계단엔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고 도둑이라도 강도라도 말야
옆방에는 누가 사는지도 몰라 어쩌면 거긴 낭떠러지인지도 몰라
성냥불은 그만 내 옷에 옮겨 붙고, 내 눈썹, 내 머리카락도 태우고
여기 저기 옮겨 붙고 훨, 훨 타올라 우리 놀란 가슴, 두 눈에도 훨, 훨

“ 엄마, 아빠,  우리가 그렇게 놀랐을 때
  엄마, 아빠가 우리와 함께 거기 있었다면...”

방문은 꼭꼭 잠겨서 안 열리고 하얀 연기는 방 안에 꽉 차고
우린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만 흘렸어,
엄마, 아빠....  엄마, 아빠....
 
 
“우린 그렇게 죽었어
그 때, 엄마, 아빠가 거기 함께 있었다면...
아니, 엄마만이라도 함께만 있었다면...
아니, 우리가 방 안의 연기와 불길 속에서 부둥켜안고 떨기 전에,
엄마, 아빠가 보고싶어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기 전에,
손톱에서 피가 나게 방 바닥을 긁어대기 전에,
그러다가 동생이 먼저 숨이 막혀 어푸러지기 전에,
그때,엄마, 아빠가 거기 함께만 있었다면...                          
아니야, 우리가 어느 날 도망치듯 빠져나온 시골의 고향 마을에서도
우리 네 식구 단란하게 살아갈 수만 있었다면...
아니, 여기가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축복을 내리는
그런 나라였다면...
아니, 여기가 엄마, 아빠도 주인인 그런 세상이었다면...
엄마, 아빠! 너무 슬퍼하지 마
이건 엄마, 아빠의 잘못이 아냐, 엄마, 아빠의 잘못이 아냐
여기, 불에 그을린 옷자락의 작은 몸뚱이, 몸둥이를 두고 떠나지만
엄마, 아빠... 우린 이제 천사가 되어 하늘 나라로 가는거야
그런데, 그 천사들은 이렇게 슬픈 세상에는 다시 내려 올 수가 없어
언젠가 우린 다시 하늘 나라에서 만나겠지
엄마, 아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운 가장 예쁜 말로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어
엄마, 아빠...  엄마, 아빠...
이제, 안녕...  안녕...”









노래 9./
92년 장마, 종로에서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 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장마비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
 신호등에 멈춰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 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워, 워.....
 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가는구나
 입술 굳게 다물고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비가 개이면,
 서쪽 하늘부터 구름이 벗어지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
 저 남산 타워 쯤에선 뭐든 다 보일게야
 저 구로 공단과 봉천동 북편 산동네 길도
 아니,삼각산과 그 아래, 또 세종로 길도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 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하늘 높이
 훠이, 훠이... 훠이, 훠이
 빨간 신호등에 멈춰 섰는 사람들 이마 위로
 무심한 눈빛 활짝 열리는 여기 서울 하늘 위로
 한 무리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훨, 훨, 훨...









 Intermission






詩 4.
             이 풍진 세상을

              아침 열 시 조금 넘어,
              BMW 신형 700 씨리즈를 현금으로 터억 턱 뽑아 타는 사람들과
              국산 소형 승용차 ㅤㄴㅓㄺ은 중고를 끌고 댕기는 사람들이 서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인간의 도시를 난 잘
              이해를 못하겠다. 또, 그들이 시내 도로를 사이 좋게
              질주하는 것을 난 잘 이해 못하겠다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구 서울운동장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밀리오레 빵빵한 옥외 스피커에서
              “5층, 6층은 팻션을 완성할 수 있는 잡화가  …”
              팻션을 완성한다? 처음 듣는 말 하지만,
              기막힌 말
              그런데, 거기서 패션을 완성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야?

              거무튀튀한 비둘기들이 아직도
              휘 휘 날아오르는 청계 5가
              좌회전하여 바로
              하늘로 올라가는
              고가를 타고 싶었는데,
              그마져 이명박 시장이 부숴버렸다
              동대문 앞에서
              한 경찰은 열심히 딱지를 끊고
              한 경찰은
              오토바이 짐꾼들과 대판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종로통을 시속 80Km로 달려와
              광화문 이순신 장군 안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건너 광고판 뉴스에
              “태국 방콕에서 한국인 1명 권총 맞아 피살”

              세종문화회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시립국악관현악단에 올라가니 연습실에서
              먼저 온 장사익 씨가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
              를 연습하고 있었다
              “세상 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 같구나”

              아,
              꿈을 깨고 싶다
              이 꿈에서
              나가고 싶다







노래 10./
건너간다

강물 위로 노을만 잿빛 연무 너머로 번지고
노을 속으로 시내버스가 그 긴 긴 다리 위
아, 흐르지 않는 강을 건너  아, 지루하게 불안하게
여인들과 노인과 말 없는 사내들  그들을 모두 태우고 건넌다

아무도 서로 쳐다보지 않고, 그저 창 밖만 바라볼 뿐
흔들리는대로 눈 감고  라디오 소리에도 귀 막고
아, 검은 물결 강을 건너  아, 환멸의 90년대를 지나간다
깊은 잠에 빠진 제복의 아이들 그들도 태우고 건넌다

다음 정거장은 어디오  이 버스는 지금 어디로 가오
저 무너지는 교각들 하나 둘 건너  천박한 한 시대를 지나간다
명랑한 노래소리 귀에 아직 가물거리오, 
컬러 신문지들이 눈에 아직 어른거리오
국산 자동차들이 앞 뒤로 꼬리를 물고  아, 노쇠한 한강을 건너간다
휘청거리는 사람들 가득 태우고  이 고단한 세기를 지나간다








노래 11./

리철진 동무에게

영화는 끝나고, 내 핸드폰엔 콜이 하나
네가 거기 꿈의 궁전 마루 바닥에 쓰러진 뒤  음, 나는
극장 지하 주차장에서 나의 딸과 나의 아내
승용차에 태우고 집으로 집으로 오, 그리곤
내 방 오디오로 아주 오랫만에 슬픈, 오 슬픈
그리스의 노래를 음,
마리아 파란도리는 애절하게 그의 조국의 비극을 노래하고
너의 주검이 다시 내 눈 앞에 빙빙 돌고
음,

그날 오후엔
올림픽 공원 펜싱 경기장  전교조 합법화 기념대회
넓은 마루 높은 무대  그 수백명의 풍물 소리 오,
끝도 없이 입장하는 전국 지회, 지부 깃발들과
열광하는 박수 함성, 승리의 노래가 오,
"굴종의 삶을 떨쳐 반 교육의 벽 부수고..."  일만여
젊은 교육 노동자들의 뜨거운, 뜨거운 노래를 들으며
나는 무대 뒤에서 하염없이 울고
한 여교사가 그의 어린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천천히 음향석 콘솔 앞을 지나가고

리철진 동무, 그래
마지막 날 동해 가던 그 승용차 뒷좌석
예쁜 화이 뺨 위의 눈물 자욱을 백미러로도 못 보고 음, 뿐만 아니라  여기, 
남한에서 내가 보았던 너무나 목메여 뜨거운
그 많은 눈물들도  음,  리철진 동무,
행사 끝난 공원에선 교사들이 밀려나오고
그 북적대는 인파 속에 네 뒷모습이
지방 대절 버스에 올라타는 도종환 시인의 뒷주머니에
깊이 꽂혀 펄럭이는 종이 깃발
그 너머로  음,






노래 11./
정동진 1.


텅 빈 대합실 유리창 너머 무지개를 봤지
끝도 없이 밀려오는 파도, 그 바다 위
소나기 지나간 정동진
철로 위로 화물 열차도 지나가고
파란 하늘에 일곱 빛깔로 워....
아련한 얼굴 가슴 저미는 손짓으로
물보라 너머 꿈결처럼 무지개를 봤지
조각배 하나 넘실대는 먼 바다 위


소나기 지나간 오후 중앙로
철교 아래 그 비를 피하던 네가
파란 하늘에 일곱 빛깔로 오....
그리운 것이 저리 멀리 아니, 가까이
차마 다시 뒤돌아서 그 쌍무지개를 봤지
텅 빈 객차 달려가는 그 하늘 위






노래 12./
오토바이 김씨

황사 가득한 날 오후  숨이 가쁜 언덕길로                       
리어커를 끌고 가는 할머니                    
그 할머니 치일듯 언덕 아래로 쏜살같이
내달려 오는 오토바이 김씨에게
이보오, 천국 가는 길이 어디요,
언덕 너머 세상이 거긴가 ?
여길 나가는 길이 어디요
할머니,  나도 몰라요   음,  음. . .

부대찌게 점심 먹고  스타벅스 커피 한 잔 씩 들고
LG 현관 앞에 서 있는 사람들
한국 통신 건물 아래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웅성 웅성 데모하는 사람들   김씨가 묻네
여보세요, 새로운 세기가 여기요,
21세기로 가는 길이 어디요,
여길 나가는 길이 어디요
아저씨, 나도 몰라요   음.  음 . . .

문정동 로데오를 들러  뒷구정에서 닭갈비를 먹고 
신천역에서 지하철을 타는 어린 연인들에게 
선릉, 삼성역을 지나, 어둔 터널을 길게 지나
올림픽 공원 역으로 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묻네,
얘들아, 청담, 압구정이 여기냐,
거긴 지하철이 서질 않더냐,
근데, 경륜장 가는 길은 어디냐
아저씨, 우린 몰라요   음, 음 . . .

잠실 주공 아파트 회색 세멘트 단지를 지나
멀리 성남으로 내달리던 김씨
롯데월드 어드벤쳐 호수 자이로 드롭에 높이 올랐다
비명 지르며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이봐, 천국 가는 할머니를 보았나 ?
절망하는 사람들을 보았나
여길 나가는 길을 보았나
그만 그만,  묻지 마세요
음, 음. . .





노래 13./
정동진 3.

정동진에 파도 치고 거기 무지개를 향해 낚시를 던지는 사내 하나 나는 봤지
그 투명하고 가느다란 낚싯줄에 매달려 허공을 날아가는 새우, 나는 봤지
아니, 납덩어리에 풍덩, 파도 속으로 사라지는 것도,
또, 그 사내 장화 발치에 죽은 생선들이 담긴 일제 아이스 박스도 나는 봤지

동태평양 멕시코 연안 그들의 긴 긴 모래밭, 그 찬 바다에 낚시를 던지고
석양을 바라보며 웅숭그리고 섰던 맨발의 추레한 중년 멕시칸 사내와
그 사내 발치의  작은 고무통. 거기, 어린  가오리들의 슬픈 목숨과
그들의 구질구질한 살림살이도 나는
그 바다에서 봤지,  그 바다에서 

그렇게, 아직 20세기의 제 3세계 남루한 사내들이 서로를 마주보며
싸구려 미끼를 던지는 먼 먼 바다 위론  태양 빛,
한 태양 빛 아래 동과 서로 날짜를 바꾸는 일자변경선이 지나가고
그 보이지 않는 선 위로 또
파도보다 조밀한 해도를 따라 거대한 상선들과 구축함대가  지나가고. 
뭍에 없는 희망을 파도 속에서 찾으려는가 
아, 바하 캘리포니아  아, 정동진
 
맨발과 만성 비염의 코흘리개 애들 그리고, 부스럼 투성이의 멕시코 개들,
먼지 뽀얀 트레일러 마을과 찡그리며 인사하고
긴 긴 사막 위로 끝도 없이 세워진 함석 판떼기 사이
철통같은 국경선을 넘어 미국으로 들어가다 
US 5번 국도 해안 절개지 아래  길다란 평원에서 기동훈련하는
수 십대의 헬기 부대도 나는 보았지 
또, 나른한 샌디애고 해안  온 몸 출렁거리는 지방질의 살갗 뽀얀 백인 노인네들
일광욕 즐기는
저 풍요조차 지루한 백사장의 늘 따스한 햇살과 칼라풀한 튜브들도 나는 봤지

아, 바하 캘리포니아, 샌디애고, 정동진. . .
저 기차는 어디로 가는가
강릉 시내 들어와 중앙 시장 골목을 헤매다 마른 오징어를 한 축 샀지
또 한 골목을 돌아 좌판에서 생선 내려 치는 무쇠 칼, 가장 큰 칼을 하나 샀지
후두둑, 소나기 노점 천막을 후려치고 지나간 뒤
중앙로 철길 너머 먼 하늘 위 쌍무지개도 나는 봤지

그날 밤에도 영화배우 박 아무개는 맥주를 마시며 돈을 벌고,돈을 세고 또,맥주를 마시고
나도 테레비를 보며 맥주를 마시다 취해 잠들어
꿈에  다시 동태평양 찬 바다와 그 투명한 햇살
정동진 바다 끝 외무지개와 강릉 시내 하늘 위의 쌍무지개를 다시 봤지
또 세 쌍무지개, 네 쌍무지개를 봤지 
때로 시내를 지나, 동해안 야산 언덕을 수도 없이 지나,
때로 절망같은 해안길 파도 부스러기에 젖어 철로 위를 끝도 없이 달리는
지난 세기의 철도청 화물 열차도 다시 봤지
그리고, 아직 날이 서지 않은 그 무쇠칼로 저  허망한 무지개들을 밤 새 자르며, 휘두르며 . .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다시 수평선 멀리 멀리 솟아오르는 수많은 무지개들을 나는 봤지

정동진 “선로에 계신 분들은 열차가 들어오니  모두 바닷가 쪽으로 내려가 주시기 바랍니다.”    * <Effect>
정동진 “모두 바다로 내려가 주시기 바랍니다. 바다로 내려가 주시기 바랍니다.”        * <Effect>   
정동진 . . .        







詩 5.

              구월 말일 밤


              속보로 걸어가는 땅바닥이
              흑백 필름처럼
              내가 마주보지 않는
              마주 오는 산책객들의 얼굴들이
              해골처럼
              큰길로 쐐앵 지나가는 차들도 유령처럼
              달빛은 있거나 말거나

              주머니 속의 핸드폰은
              딴 세상 전갈을 기다리고
              횡단보도를 뒷바퀴로만 굴려서 지나가는
              젊은 애들의 경쾌한 자전거 묘기도
              꿈처럼
              아득

              어둔 밤거리 배회하는
              죽음의 그림자가
              오히려 현실답

              낼 아침 머리를 깎으러
              설마 산으로야 가겠느냐

              가을밤이 다시
              더워지거나 말거나
              그러는 동안
              나 더 머얼리 떠내려가
              거나 말거나

              잘 가
              담배 하나
              입에 물고






노래 14./
바   람

이제는 사랑하게 하소서
여기 마음 가난한 사람들
길목마다 어둠이 내리고
벌써 문이 닫혀요
자, 돌아서지 말아요
오늘밤의 꿈을 받아요
홀로 맞을 긴 밤 새에
포근하게 잠든 새에
당신 곁을 스쳐갈
나는 바람이여요


이제 곧 어두운 골목길에도
발자욱 소리 그치면
어둠처럼 고이 고이
당신곁에 갈테요
밤하늘 구름 저 너머
당신 꿈을 펼치고
못 다한 사랑 이야길랑
내게 말해 주세요
고운 사랑 전해 줄
나는 바람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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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사랑하는 박은옥 님,

사실은, 이 콘서트는 당신을 위한 콘서트입니다.
이번 콘서트 정말, <박은옥의 30년>을 위한 잔치여야 합니다.

노래를 진정 사랑한 쪽은 당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노래로 많은 위안을 얻었듯이, 나도 노래로 누군가를 위안하고 싶다”했던 당신의 30년.
난, 우리들 속의 권력자가 되어 당신의 시야를 가리고, 당신의 노래, 당신과 사람들 사이에 개입하고,
나의 생각을 강요하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리고, 정말 당신이 원하는 노래들을 만들어 주지 못하고 ‘나의 노래’만을 만들었습니다.
미안하고 미안합니다.
이번 콘서트 또한, 당신을 위해 옆에서 돕겠다고 하며 참여하였으나 결국은 또다시 나의 공연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너무도 받고 누린 것이 많은 사람이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여보,
지난 30년 동안의 수많은 나의 말들, 노래들... 그건 당신과의 소중한 삶들 속에서 사유하고 이야기 나눈 결과물들이었습니다. 그 노래들은 나 혼자서 만든 노래가 아니었고 함께 만든 노래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정태춘 박은옥’이라 불려졌던 그 긴 날들의
오로지 <정태춘>만을 위해 만들었던 노래들, 그 노래들을 오늘은 당신만을 위해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번 콘서트 마지막 노래까지 그렇게 부를 것입니다.
받아주신다면, <정태춘 30년의 모든 노래>를 당신의 30주년 선물로 드립니다.
변변치 못하지만 당신과 함께 있어 만든 노래들이었기에 말입니다.

여보, 30주년을 축하해요. 또 그 기념 콘서트를 축하해요.
이번 콘서트는 당신의 콘서트예요.
나보다 더, 노래를 정말 사랑했던 당신이 바로 이 잔치의 주인공이예요.
공연 내내 행복하세요.

그리고, 너무나 쉽지 않았던 긴 세월 동안
나와 함께 해 줘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못난 남편, 정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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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14./
詩人의 마을

창문을 열고 내다봐요
저 높은 곳에 우뚝 걸린 깃발 펄럭이며
당신의 텅 빈 가슴으로 불어오는
더운 열기의 세찬 바람

살며시 눈 감고 들어봐요
먼 대지 위를 달리는 사나운 말처럼
당신의 고요한 가슴으로 닥쳐오는
숨가쁜 벗들의 말발굽 소리

누가 내게 손수건 한 장 던져 주리오
내 작은 가슴에 얹어 주리오
누가 내게 탈춤의 장단을 쳐 주리오
그 장단에 춤추게 하리오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오
나는 日沒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수도승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테요


우산을 접고 비 맞아봐요
하늘은 더욱 가까운 곳으로 다가와서
당신의 그늘진 마음에 비 뿌리는
젖은 대기의 애틋한 우수

누가 내게 다가와서 말 건네 주리오
내 작은 손 잡아 주리오
누가 내 운명의 길동무 돼 주리오
어린 시인의 벗 돼 주리오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오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수도승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테요







詩 7.


              어머니 2.

              정말
              바닥에
              갔다 온 기분이예요
              거기 떨어져 한동안
              기어오를 밧줄이 없어 허우적거리다가
              사실
              온 몸에 매달려 있는 너절한 끄나풀들을
              떼어내는 그런 노역이었어요
              못된 세상과의 오랜 애증의 끈들

              다시,
              이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줄 아세요?
              아니예요
              새로운 자리를 찾았어요

              세상이 더 멀리 보이는,
              사람들이 더 멀리 보이는
              그런 한적한 자리

              역사에 비상구가 있다면 그
              비상구 가까운 곳에
              제 자리가 있어요

              그래도 가끔씩은
              중얼거리기도 할테지요
              떠들기도 할테지요, 혼자
              또는 …

              거기서
              분노도, 절망도, 열정도 없이
              그리움도 없이
              무던한 여생을 보낼 수 있을지 …

              사실,
              아무 때고 내키는 대로
              저 혼자 열고 나갈
              그런 비상구는 없답니다
              거기 그냥
              제가 써 붙인
              글씨예요



              그래도
              이렇게 다시
              올라왔다는 게
              중요하잖아요?

              어머니 . . .







노래 15. /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마
막차는 생각보다 일찍 오니
눈물 같은 빗줄기가 어깨 위에
모든 걸 잃은 나의 발길 위에

싸이렌 소리로 구급차 달려가고
비에 젖은 전단들이 차도에 한 번 더 나부낀다
막차는 질주하듯 멀리서 달려오고
너는 아직 내 젖은 시야에 안 보이고

무너져, 나 오늘 여기 무너지더라도
비록 비참한 내 운명에 무릎 꿇더라도
너 어느 어둔 길모퉁이 돌아 나오려나
졸린 승객들도 모두 막차로 떠나가고


그 해 이후 내게  봄은 오래 오지 않고
긴 긴 어둠 속에서 나 깊이 잠들었고
가끔씩 꿈으로 그 정류장을 배회하고
너의 체온, 그 냄새까지 모두 기억하고
다시 올 봄의 화사한 첫차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내 영혼 비에 젖어 뒤척였고

뒤척여 내가 오늘 다시 눈을 뜨면
너는 햇살 가득한 그 봄날 언덕길로
십자가 높은 성당 큰 종소리에
거기 계단 위를 하나씩 오르고 있겠니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마
첫차는 마음보다 일찍 오니
어둠 걷혀 깨는 새벽 길모퉁이 돌아
내가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나가마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 차를 타고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로 가마








노래 15./
사랑하는 이에게  3


그대 고운 목소리에
내 마음 흔들리고
나도 모르게 어느새
사랑하게 되었네

깊은 밤에도 잠 못 들고
그대 모습만 떠올라
사랑은 이렇게 말없이 와서
내 온 마음을 사로잡네

음, 달빛 밝은 밤이면
음, 그리움도 깊어
어이 홀로 새울까
견디기 힘든 이 밤

그대 오소서 이 밤길로
달빛 아래 고요히
떨리는 내 손을 잡아주오
내 더운 가슴 안아주오

출처 : 정태춘 박은옥
글쓴이 : dar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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